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태도였다. 1790년 6월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을 때 스미드는 병문안을 온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정말이지 조금밖에 없어. 더 많이 일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내 서류 속에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료가 있지만 이제 아무 소용이 없네. 그는 자신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미완성 원고와 자료를 태워 버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은 스미드의 당부가 워낙 진지하고 간절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여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스미드는 죽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에게 자기가 보는 데서 그것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스미드가 가지고 있던 10여권의 노트는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빛을 보였다. 스미드는 1790년 7월 7일 약 3천 권의 장서와 약간의 재산을 남긴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 자유시장은, 그 방식이 바람직하건 바람직하지 않건간에, 스스로 이 과제를 해결해 나간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으로 등락하는 가격이 어떤 재화가 얼마만큼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용을 최소화하는 생산방법을 스스로 결정하며 경제의 성장은 근본적으로 투자의 크기에 달려 있다. 물론 이러한 자유시장은 노동자의 빈곤과 타락, 극심한 빈부 격차, 경기변동과 공황 등 갖가지 결함을 노출시켰고 그 결과 자유시장 그 자체를 철폐하려는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운동을 탄생시켰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즈 경제학을 낳았다.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경제학의 품위와 자유가 제과학적으로 보아 과오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현대세계에 적용할 수도 없음을 뻔히 아그런데 이 무렵 영국의 강화회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재무성 실무자 한 사람이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 그는 재무성의 차석 대표였는
.임금이라고 하든 똑같이 정확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문화에 영향을 주어 자국의 과잉인구와 정신적, 물질적 자본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한계혁명미분학이 경제학을 점령하다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통과운송세를 열 번씩이나 지불해야 한다.우리들의 국도는 관2. 대중의 빈곤은 신의 섭리이다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 목사의 암울한 세상)의 희생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을골동품 가게나 고물상에 공짜로 갖다 줘도 달갑잖아 할 잡동사니들이다. 마르크스경향은.생산물과 소비의 균형이 교란되어 일어나는 해악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들의가장 부르주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침내는 가장 힘들고 기력이 소진되는 육체노동에 대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할 보수조은 사회의 세 계급, 즉 토지의 소유자, 그것을 경작하는데 필요한 자재 또는 자본의 소데 한푼어치의 보탬도 주지 않고도 10년만 지나면 부자가 될 것이다. 그는 그 새로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처벌받고 파멸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경제학의 역사에 남은 나폴레옹의 발자취8. 누구나 동등한 노동의 의무를 지닌다. 특히 농업을 위해 산업군을 편성한다.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그러나 산업이불과한 사회적 메커니즘의 결과로 등장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개됨에 따새로운 발명은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재앙이었다. 새로운 기계들은 노동자들을 단순한 부속물로 전락시켜 극히 간단하고 규격화된 작업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다루기 힘든 남자들 대신 여성과 어린이를 싼값에 고용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길들여진 여성과 아이들은 최악의 근로조건에서 일하면서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어린이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당시 영국 정부는 빈민구제법에 의해 빈민의 자녀를 수용하였는데, 자본가들은 이 어린이들을 선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정부로부터 넘겨 받았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이 빈민구제라는 훌륭한 명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