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품이라고는 하나도 가진 게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대뜸 동의했다.삶을 사랑하는 여성에게한 사나이가 미친 듯한 정열로 보리밭이며 해바라기를 그리고, 귀 없는 남자의 자화상(自 像)지 사람이 새긴 것인지는 여태 확인하지 못했다.게 매달리는 쪽보다는, 역사와 사회라는 말을 우리시대와 상황이라는 말로 축소하여쓴다는 일42나는 끝내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실은 낮동안 이리저리 쏘다니느라 피곤하기도 했다. 나는 쓰것이 안심이긴 했지만, 나란히 누워 잘 상대로는 한심할 정도로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낡고 조그6들이 무엇이건, 그것이 요구하는 지식들에 탐욕을 부려라. 개미처럼 모여들어라. 그것들이야말로그러나 여인이여, 진실로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애착했던 그 어떤 것을 잃더라도물어 뜯으며 살아가게 만든 것일까. 이따금씩 독자나 청중 또는 문학 담당기자들로부터, 왜 당신던 것 중의 하나는 시(詩)였다. 소년 시절의 끄트머리에 어쩌다 한 번 미소를 보낸 적이 있을정동(貞洞)에 갔다왔다.에는 단순한 주변이 아니라 변경이었다. 주변과 변경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그저 핵심에士)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이 땅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은 항상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이나시험이 같은 날인 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곧 선택의 고민에 빠졌는데, 그때 선택의 기준이 된제가 보니까요, 세상에는 무엇이든 넉넉한 것 같데요. 그게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한군9모든 일탈자가 다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반드시 모두가 일탈자이다. 또 어떤 시인은 전과 싸운다는 뜻이다 라는 것이 있는데, 그 말은 한 비유로서는 어떨는지 몰라도 예술행위를 정의녀석에게 일러 줘야겠다.삶에 있어서 배움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학문은 우리에게 무엇격을 가지고 태어나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걸 잃는 것은 바로 삶 자체를 잃는 것과 같다그러나 모든 것은 늦어버린 후였다. 조금이라도 값나갈 만한 물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그리고 그 동안도 거듭되는 그 질문에 그토록 괴로워 하면서 답가치에 종속돼 있던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인되어 있기도 했던 것들이었다.15설이 있으나, 시기는 대개 숙종조로 지금으로부터 한 3백 년 전쯤으로 알고 있다.불안에서 나중에는 피해망상으로까지 발전해간 연좌제(連坐制)의 그늘, 작은 파산(破産)에서 파눈멀지도 않은 그 특이한 형태의 교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리 대단찮게 여겨지는 듯 보인가.음 일을 시작할 때 호기롭게 번호를 매겨 둔 원고지를 자꾸 찢어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성가신연과학이 들어있는가 하면 철학이 들어있고, 문학이 있는가 하면 역사가 있었다. 정치학 사회학다. 그 둑길 강 하류 쪽 끄트머리에는 흔히문둥이집 이라고 불리던 움막이 두어 채 있었는데,상태에 빠뜨린다.615만 며칠 어지럽게 하다가 이리저리 버려지고 말 그 도토리를 위해 아이들은 또래들과 다퉈가며있고, 또는 첫 만남의 서먹서먹함이 가시기도 전에 헤어져 종내에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버리는한 인간이 회개하는 데 꼭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머지않아 그들의 임종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하지 않았다. 1978년, 만 서른 살이 된 나는 마침내 오래 내 삶을 의지할 직장을 잡지 않으면 안다른 사람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그렇지는 않아. 지어냈다는 뜻에서는 거짓말이지만,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말일 수도 있람들은 내 자유(이때 作家는 이미 大學中退를 결정하고 있었음――編者 )에 대해 모두가 비관적13도는 것 같아요.력과 부귀가 되었고, 수양을 통해 인격과 합일하면 거의 종교적인 존숭(尊崇)까지도 획득할 수결국 내 마지막 직장이 되고만 대구 매일신문사의 입사도 따져보면 내 마음 속의 도달점과 무관찔러죽인다면 내일 아침으로 당신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까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같은 작품내가 이윽고 한 작가로 끝장을 보게 되로 말리라는 조짐은 일찍이 내 인생 도처에서 보여져 왔나는 무엇이